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버트 빅터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bert_Victor_1875.jpg]]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궁전과 멀리 떨어진 말버러 하우스에서 친구들과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불륜같은 소위 불건전한 행동을 자주 벌였다. 일례로 앨버트 빅터 공자가 6살 무렵 아버지 웨일스 공은 그의 수많은 정부들 중 1명의 이혼 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고 이것은 앨버트의 아버지가 바람둥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일 중 하나였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에드워드의 영향 아래 성장하는 손자들을 걱정했고, 직접 손자들의 교육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부터 앨버트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고용한 가정 교사인 존 달튼 목사에게 남동생 [[조지 5세|조지 왕자]]와 함께 교육받았다. 존 달튼은 야망은 있는 인물이었지만 훌륭한 교사는 아니었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 스케줄을 고안했고 그것을 강요했다. 앨버트 빅터 왕자와 조지 왕자는 그를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기초 교육조차 받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달튼은 자신의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서 앨버트 빅터 왕자의 지적 능력과 인성 모두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했다. 뿐만 아니라 2개월 일찍 태어난 것[* [[에드워드 7세]]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부부의 아이들은 '''전부 조산으로 태어났는데'''(앨버트 빅터의 경우 2개월 조산으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라 공주가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에 참석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일부러 [[임신]] 날짜를 잘못 계산했다는 얘기가 있다.] 때문에 학습능력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비서인 헨리 폰슨비는 어머니의 난청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대영제국]]으로 불릴 만큼 위대했던 영국의, 보통 왕자도 아니고 차차기 왕의 자리의 오를 왕자였기 때문에 [[영국군]]에도 신경써야 하는데, 정작 본인은 군대에 관심이 없고 남동생 조지 5세가 해군에 열광하여 [[밀덕]]이 되어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